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만 원주민 (문단 편집) ==== [[대만청치시기]] ==== [[1683년]] [[강희제]]가 동녕 왕국을 멸망시킨 후에 [[청나라]]는 미개척된 [[타이완 섬]] 동북부에 진출하여 그곳을 정복했다. 한족들의 이주가 증가하면서 토지를 빼앗긴 원주민들은 계속 산악 지대로 밀려났다.[* 이로 인해 [[툰샤오 사 사건]]이 벌어진다.] 결국 [[1732년]] [[옹정제]] 통치 때에는 다두 왕국의 마지막 후신들이 한족의 군사작전으로 인해 그대로 토벌당해 다두 왕국은 멸망한다. 이 사건을 [[대갑서사항청사건]](大甲西社抗清事件)이라고 부르며 그렇게 다두 왕국의 영토는 [[청나라 치하 타이완 섬|청나라의 관할]]이 되었으며 청나라는 [[타이완 섬]]을 [[복건성]] 영토로 편입시키고 [[타이난]]을 중심으로 타이완 섬을 통치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족]]의 대만 이주가 본격화된다. 청 정부는 타이완 섬이 또 다시 다른 세력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족]]들의 타이완 섬 이주 금지 정책을 펼쳤지만, 전근대의 모자란 행정력 때문에 한족들의 불법 이주가 판을 쳤다.[* 이들은 대개 대륙에서 가난하게 살던 자들이나 나라에 찍힌 [[해적]]들이었기에 어차피 이주를 막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주한 한족들은 대체로 [[타이난]] 인근에 정착하여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점차 이주민이 증가하면서 이들의 거주 범위도 타이완 섬 평야지대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청나라는 한족과 원주민(당시에는 날것 그대로의 야만인이라는 멸시 의식에서 생번(生蕃)이라 하였다)의 경계인 '번계(蕃界)'를 정해 서로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을 금했지만, 한족의 이주가 계속되면서 한족들이 점차 번계를 넘어 원주민 영역에서 마을을 만들거나 농사를 짓고, 시간이 흘러 번계가 재조정되어 원주민 영역이 점차 축소되어 갔다. 또 원주민 영역에서 토지를 빌리거나 사서 건축이나 농사를 지은 한족들도 있었지만 원주민 토지를 강탈한 한족들도 있었다. 이렇게 한족의 생활영역과 원주민의 생활영역이 중첩되기 시작하고, 타이완 섬 한족 주민의 남초현상이 심각했기에, 한족 남성들이 주로 평야지대의 대만 원주민 [[여성]]들과 혼인하여 대만 원주민의 한족 동화가 촉진되었다. 청나라는 타이완 섬을 영토로 삼고 통치했지만 중앙에서 너무나 먼 땅이라 그런지 행정력은 그리 강하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는 원주민들과 대륙에서 밀려들어와 대만에 정착하고자 하는 한족의 갈등이 공권력의 통제를 벗어난 상태로 끝없이 벌어졌다. 원주민들은 밀려드는 한족에 맞서 자신의 영역을 내주지 않기 위해 자체적인 무력으로 한족 마을을 습격했고, 반대로 평야에 정착한 한족들도 마을마다 [[자경단]] 비슷한 것을 만들어 원주민들의 습격에 대응하거나 원주민 마을을 공격했다. 그러나 한족 이민 인구는 원주민 인구를 쉽게 압도했고, 따라서 큰 틀에서 보면 이 시기 원주민들은 점차 대만의 한족과 동화되거나 산으로 밀려나갔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인상적인 사건으로 1867년 로버호 사건으로 인해 대만으로 원정온 미해병대를 대만 원주민인 파이완족이 격퇴한 사건이 있다.[[https://en.wikipedia.org/wiki/Formosa_Expedition|영문위키]] 일본과도 이와 비슷한 [[모란사 사건]]이 있었다. 대만 원주민들이 파이완족이 표류해온 [[류큐인]] 수십 명을 살해했고, 이에 [[일본 제국]]이 [[사이고 주도]] 등이 이끄는 일본군을 파병해 파이완족을 학살한 사건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